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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표 선수가 우즈벡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울지 않았습니다. 박지성 선수가 '너무 감성적'이라는 이영표 선수가 울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난 남아공 월드컵 때 이미 뜨거운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영표 선수가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그 경기가 대표팀 마지막 경기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는데요. 이영표 선수는 오늘 인터뷰에서 "지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을 은퇴할 계획이었으나 조광래 감독이 아시안컵을 같이 해보자고 해 은퇴 시기가 늦어졌다"고 밝혔습니다. 한 마디로 은퇴라는 단어에 충분한 내성이 생겨서 감성적인 이영표가 폭풍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월드컵에서 뜨거운 눈물을 보이면서 '울보'라는 별명을 새로 얻게 된 이영표 선수는 지난 12년 동안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헛다리 짚기와 같은 국내 축구에선 보기 힘들었던 축구 스킬이 만들어 준 '꾀돌이', 초롱초롱한 눈빛이 영리함이 만들어준 '초롱이', 종교가 만들어 준 '그라운드의 전도사', 2010 분데스리가 최우서선수상에 빛나는 뮌헨의 로벤이 만들어준 '영표횽',그리고 그를 영원한 대한민국 대표팀의 레전드로 기억하게 할 그의 엄청난 체력이 만들어낸 '철인'까지 올드 보이들 중에선 가장 많은 별명을 가진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마 이들 별명 중에서 이영표 선수 본인은 '울보'라는 별명이 가장 민망할 것 같습니다.
아시안컵 마직막 경기를 마친 후 울보 이영표 선수는 울지 않았지만 그의 팬들은 '레전드'의 퇴장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건 아마 그가 지난 12년간 보여준 대표팀에 대한 헌신과 사랑 때문이겠죠.
이영표 선수의 대표팀 역사는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 승선부터 시작됩니다.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올림픽 대표팀은 박진섭이라는 특출난 오른쪽 윙백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유독 왼쪽 윙백 자원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데요. 1999년 2월 던힐컵에서 왼쪽 윙백이 계속해서 뚫리자 윙백에 대한 언론의 질타가 이어졌고, 허정무 감독은 당시 건국대 졸업반이었던 이영표 선수를 테스트용 선수로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시킵니다. 그런데 테스트용 선수로 데려왔던 이용표는 그야말로 숨겨진 무림고수였던 거죠. 이후 허정무 감독은 이영표 선수를 "공을 받는 순간 이미 어디로 공을 줘야 하는지 아는 선수"라며 "늦게 발견한 진주"라는 극찬을 하게 됩니다.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이영표 선수는 1999년 6월 성인 대표팀에 운 좋게 승선하게 됩니다. 하석주, 김도훈, 유상철 선수가 벨기에와의 친선경기에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3명의 신예를 긴급 투입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이영표 선수였던 거죠. 당시 언론은 이영표 선수를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2골 2어시스트를 기록한 신예'라고 표현했습니다. 참고로 이때 이영표 선수와 함께 대표팀에 승선한 선수는 박진섭, 김도균 선수이고 감독은 이번에도 허정무였습니다.
그렇게 주전 선수들의 대타로 대표팀에 승선한 어린 이영표는 멕시코를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치르게 됩니다. 그것이 12년간 펼쳐질 대장정의 첫 걸음이 될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겠죠.
지난 월드컵에서 뜨거운 눈물을 보이면서 '울보'라는 별명을 새로 얻게 된 이영표 선수는 지난 12년 동안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헛다리 짚기와 같은 국내 축구에선 보기 힘들었던 축구 스킬이 만들어 준 '꾀돌이', 초롱초롱한 눈빛이 영리함이 만들어준 '초롱이', 종교가 만들어 준 '그라운드의 전도사', 2010 분데스리가 최우서선수상에 빛나는 뮌헨의 로벤이 만들어준 '영표횽',그리고 그를 영원한 대한민국 대표팀의 레전드로 기억하게 할 그의 엄청난 체력이 만들어낸 '철인'까지 올드 보이들 중에선 가장 많은 별명을 가진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마 이들 별명 중에서 이영표 선수 본인은 '울보'라는 별명이 가장 민망할 것 같습니다.
아시안컵 마직막 경기를 마친 후 울보 이영표 선수는 울지 않았지만 그의 팬들은 '레전드'의 퇴장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건 아마 그가 지난 12년간 보여준 대표팀에 대한 헌신과 사랑 때문이겠죠.
이영표 선수의 대표팀 역사는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 승선부터 시작됩니다.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올림픽 대표팀은 박진섭이라는 특출난 오른쪽 윙백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유독 왼쪽 윙백 자원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데요. 1999년 2월 던힐컵에서 왼쪽 윙백이 계속해서 뚫리자 윙백에 대한 언론의 질타가 이어졌고, 허정무 감독은 당시 건국대 졸업반이었던 이영표 선수를 테스트용 선수로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시킵니다. 그런데 테스트용 선수로 데려왔던 이용표는 그야말로 숨겨진 무림고수였던 거죠. 이후 허정무 감독은 이영표 선수를 "공을 받는 순간 이미 어디로 공을 줘야 하는지 아는 선수"라며 "늦게 발견한 진주"라는 극찬을 하게 됩니다.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이영표 선수는 1999년 6월 성인 대표팀에 운 좋게 승선하게 됩니다. 하석주, 김도훈, 유상철 선수가 벨기에와의 친선경기에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3명의 신예를 긴급 투입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이영표 선수였던 거죠. 당시 언론은 이영표 선수를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2골 2어시스트를 기록한 신예'라고 표현했습니다. 참고로 이때 이영표 선수와 함께 대표팀에 승선한 선수는 박진섭, 김도균 선수이고 감독은 이번에도 허정무였습니다.
그렇게 주전 선수들의 대타로 대표팀에 승선한 어린 이영표는 멕시코를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치르게 됩니다. 그것이 12년간 펼쳐질 대장정의 첫 걸음이 될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겠죠.
▲ 로벤의 영표횽 영상
꾀돌이라는 별명을 만들어준 이영표 선수의 '헛다리 짚기'가 축구팬들 사이에서 대대적으로 알려진 것도 바로 멕시코전이었습니다. 공격진의 누수로 인해 걸어잠그기식 수비 축구를 꿈꾸며 데려온 이영표 선수는 멕시코 수비수 상대로 헛다리 짚기로 상대 수비를 교란시키며 축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당시 스쿼드를 보면 대표팀으로 뛰고 있는 선수 한 명도 없습니다. 그만큼 이영표 선수는 그의 말처럼 대표팀을 '오래 해먹은' 건데요. 오늘 인터뷰에서 이영표 선수는 '후배들을 위해 길을 터주는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후배들이 잘하기 때문에 물러나는 것이다. 12년이나 했는데 이제 후배들에게 길을 터준다고 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영표 선수의 12년 장기집권은 그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승선을 위해 그는 과감히 도르트문트를 떠나 중동의 알 힐랄 FC로 이적을 감행합니다. 이영표 선수의 팬들에겐 청천벽력같은 이적 소식이었죠. 독일의 명문구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2010년까지 계약 연장을 구두로 합의한 상태에서의 갑작스러운 이적이라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런데 그의 중동행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승선과 좋은 활약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토트넘에서 도르트문트로 이적한 이영표 선수는 2008/2009시즌을 뛰었으나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부상을 당해 오랜기간 필드를 누빌 수 없었고, 부상에서 회복할 때 즈음 1998년부터 도르트문트의 수비를 이끌었던 데데가 복귀하면서 벤치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 출전을 위해서는 경기감각을 끌어올려야 했던 이영표 선수는 파격적인 이적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거죠. 그만큼 월드컵과 대표팀의 성적은 이영표 선수에게 1순위였던 겁니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통해 빅리그로 진출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대한민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빅리그에서 중동의 리그로 향했던 이영표 선수가 대표팀을 떠난다니 그의 팬들의 눈시울은 뜨거워질 수 밖에 없는 거겠죠?
이영표 선수는 1999년 6월 12일부터 2010년 1월 29일 오늘까지 무려 127경기를 종횡무진 필드를 내달렸습니다. 127 경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 2002년 한일 월드컵이라고 합니다. 아마 이영표 선수가 빅클럽을 마다하고 중동으로 떠났던 이유가 바로 후배들에도 당시의 기쁨과 영광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월드컵 4강, 원정 첫 16강, 아시안컵 3위라는 선물을 남기고 떠나는 이영표 선수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이영표 센추리클럽
당시 스쿼드를 보면 대표팀으로 뛰고 있는 선수 한 명도 없습니다. 그만큼 이영표 선수는 그의 말처럼 대표팀을 '오래 해먹은' 건데요. 오늘 인터뷰에서 이영표 선수는 '후배들을 위해 길을 터주는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후배들이 잘하기 때문에 물러나는 것이다. 12년이나 했는데 이제 후배들에게 길을 터준다고 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영표 선수의 12년 장기집권은 그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승선을 위해 그는 과감히 도르트문트를 떠나 중동의 알 힐랄 FC로 이적을 감행합니다. 이영표 선수의 팬들에겐 청천벽력같은 이적 소식이었죠. 독일의 명문구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2010년까지 계약 연장을 구두로 합의한 상태에서의 갑작스러운 이적이라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런데 그의 중동행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승선과 좋은 활약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토트넘에서 도르트문트로 이적한 이영표 선수는 2008/2009시즌을 뛰었으나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부상을 당해 오랜기간 필드를 누빌 수 없었고, 부상에서 회복할 때 즈음 1998년부터 도르트문트의 수비를 이끌었던 데데가 복귀하면서 벤치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 출전을 위해서는 경기감각을 끌어올려야 했던 이영표 선수는 파격적인 이적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거죠. 그만큼 월드컵과 대표팀의 성적은 이영표 선수에게 1순위였던 겁니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통해 빅리그로 진출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대한민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빅리그에서 중동의 리그로 향했던 이영표 선수가 대표팀을 떠난다니 그의 팬들의 눈시울은 뜨거워질 수 밖에 없는 거겠죠?
이영표 선수는 1999년 6월 12일부터 2010년 1월 29일 오늘까지 무려 127경기를 종횡무진 필드를 내달렸습니다. 127 경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 2002년 한일 월드컵이라고 합니다. 아마 이영표 선수가 빅클럽을 마다하고 중동으로 떠났던 이유가 바로 후배들에도 당시의 기쁨과 영광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월드컵 4강, 원정 첫 16강, 아시안컵 3위라는 선물을 남기고 떠나는 이영표 선수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이영표 센추리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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